한옥

[스크랩] 한옥의 재료

행복한건축가s 2009. 1. 13. 15:40
1. 한옥과 흙
 
▶ 기와
 
기와는 개와(蓋瓦)라고도 하는데, 중국의 문헌인 "고사고(古史考)"에 "하(夏)나라때 곤오씨가 기와를 만들었다(夏時昆吾氏作瓦)"라는 옛 기록이 있고, 약 3천년 전 주나라때 사용된 기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낙랑시대(樂浪時代)라 불리는 삼국시대 초기에 처음으로 건물에 사용되었다. 이때에는 평기와(平瓦) 처마에 아직 와당(瓦當 기와 한쪽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이 발달되지 못하였으나,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에는 연화(蓮華)무늬의 원와당이 발달하였다.
 
    
삼국시대의 기와는 주로 육조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구려는 전통성을 살려 소용돌이꼴 무늬에 특색이 있는 다양성을 보였으나 백제에서는 간소한 연화무늬가 주류를 이루어 남조(南朝)의 강한 영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고구려 ? 백제의 유적에서 평기와의 처마 끝에 지압(指壓)무늬(손끝으로 누른 무늬)가 발견된 것은 처마평기와(軒平瓦)가 와당으로 발전하는 원초적 형태다.
 
기와의 형태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암키와(평기와)와 수키와(둥근기와)인데, 일반적으로 지붕은 산자 위에 진흙을 이겨 얇게 편 다음, 위 ? 아래로 암키와를 걸치고 좌우의 이음매에 수키와를 덮는다. 그리고 처마 위에 물끊기로 막새를 붙이는데 암키와 끝의 것을 암막새, 수키와 끝의 것을 수막새라고 한다. 지붕마루는 기왓골에 맞추어 수키와를 옆으로 세워 막고, 그 위에 수키와를 한 줄로 세워 댄다. 전자를 착고(着高), 후자를 부고(付高)라 하며, 그 위에 마루장을 3∼7겹 덮고 최상부에 수마루장을 덮는다. 마루의 양 끝에는 용두 기와를 세워 장식을 겸한다. 
 
▶ 전돌

전돌은 주로 벽돌무덤, 궁궐 및 사원 건축에 이용되었는데 그 종류나 쓰임새, 모양이 다양하다. 전돌은 용도에 따라 무덤 전돌과 탑 전돌 등으로 구분된다. 형태에 따라서는 방형 전돌, 삼각 전돌, 능형 전돌(陵形塼), 이형 전돌로 구분되고 문양의 유무에 따라 민무늬 전돌과 무늬 전돌로 나뉘기도 하며, 글씨가 새겨진 명문 전돌도 있다. 무덤 전돌은 고구려나 백제에서 확인되며, 공주의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의 것이 대표적인데, 부여 정동리 가마터유적에서 발견된 연꽃무늬와 글씨가 있는 전돌은 무령왕릉에 쓰인 전돌들과 비슷하여 주목된다.
 
무늬 전돌은 부여 외리 유적에서 출토된 8종의 무늬 전돌이 대표적인 예로서 산경(山景)무늬, 귀형(鬼形)무늬, 반용(蟠龍)무늬, 봉황무늬, 연화와운(蓮花渦雲) 무늬 등이 출토되었다. 이 전돌들은 조각 수법이 매우 세련되었고, 화려한 의장(意匠)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군수리 절터에서 출토된 상자모양 전돌이 있다. 이러한 무늬 전돌은 6∼7세기에 제작된 것이 많으며, 백제미술의 부드러움이나 세련됨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 한옥과 소나무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모두 주고 가는 소나무
의식주의 모든 생활에서 소나무는 아주 중요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나무와 인연을 맺는다. 소나무는 적송(赤松)아러 뷸리기도 하는데, 이는 소나무의 껍질이 붉고 가지 끝에 있는 눈의 색깔도 붉기 때문이다.
  
 

소나무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중생대의 삼첩기 말기로, 지금으로부터 대략 1억 7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나무의 솔은 상(上). 고(高). 원(元)이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무 중의 '우두머리' 라는 뜻이다.
 
소나무는 한민족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의식주의 모든 생활에서 소나무는 아주 중요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나무와 인연을 맺는다. 소나무로 기둥을 만들고 대들보를 올린 집에서 태어나고, 태어난 아기를 위해 솔가지를 매단 금줄을 쳐서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걸 막는다. 산모는 소나무 장작불로 지은 밥과 미역국을 먹고 그 불로 따뜻해진 온돌방에서 조리를 했다.
 
송판(松板)으로는 가구를 만들었으며 솔가리는 불쏘시개로 썼다. 음식에도 소나무는 빠질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식재료다. 한민족은 솔잎으로 만든 송편을 해 먹었으며 솔잎주를 담아 마시기도 했고 꽃가루로 송화주(松花酒)를 빚고, 새순을 넣고 빚은 술 송순주(松筍酒)를 즐겼다. 구황이 들 때는 소나무 속껍질 인 송기(松肌)를 벗겨 떡도 만들고 죽을 쑤어 먹기도 했고 송홧가루로 다식을 만들어 먹었으며, 솔잎으로 차를 다려 마시기도 했다.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복령(茯笭)은 약제로 쓰이고 송이버섯은 최고의 음식으로 친다.
 
소나무 껍질에 홈을 파서 송진을 모아썼고, 소나무 뿌리를 건류(乾溜)하여 송근유(松根油)라는 기름을 만들어 불을 밝혔으며,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 송연(松烟)으로 먹(墨)을 만들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여승들은 소나무 겨우살이로 만든 송낙(松蘿)을 쓰고 다녔으며, 양반들은 송진이 뭉친 호박으로 마고자 단추를 해 달았고, 산림처사들은 송도(松濤)와 송운(松韻), 즉 바람결에 흔들리는 소나무의 운치 있는 맑은 소리를 즐겼다. 소나무의 푸른 빛깔인 송취(松翠)와 소나무 그림 병풍을 펼쳐 두고 즐겼던 선비가 한둘이었을까. 생을 마친 뒤 소나무로 짠 관에 묻혀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민족은 태어나서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나무에게 신세를 졌던 것이다.
 
한민족과 깊은 인연을 지닌 소나무는 민족의 정서와 기질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건축분야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소나무는, 오두막이든 초가삼간이든 솟을대문 세도가의 아흔아홉 칸 저택이든, 구중궁궐 크고 작은 권부의 대궐이든, 건축재로서의 국가 존립의 한 기틀을 형성했다.
 
특히 궁궐을 지을 때는 오직 소나무를 사용했다. 이는 나무결이 곱고 나이테 사이 폭이 좁으며 강도가 크고 잘 뒤틀리지 않으면서도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송진이 있어 습기에도 잘 견딜 뿐만 아니라, 진이 빠지더라도 나무가 견고해져 마른 후에도 갈라지지 않는, 목재중의 목재가 바로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출처 : 학천농장
글쓴이 : 학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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